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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중 조선군 근왕병 위치 정리 (10/3 최신화) 역사 관련 게시물


중국 고대 도성 발달사 (2) 중국 최초의 취락을 찾아서 역사 관련 게시물

이 연재는 2018. 8. 18. 개최된 부흥학회 발제 「고대 중국의 도성 경관」의 토론자료를 정리한 것입니다.

 오늘날 인류는 거의 강박적으로 생(生)과 사(死)의 거리를 최대한 멀리 떨어뜨리려 한다. 당장 한국을 보아도 매장지는 도시로부터 멀리 떨어진 산 속에 마련되어 있으며, 화장장 역시 지역사회의 거센 반발을 사는 대표적인 기피시설이다. 하지만 정작 인류의 원초적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취락들을 살펴보면 그들이 의도적이고 논리적으로 생과 사의 거리를 인식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그들의 인식 속에서는 산 자의 세상과 죽은 자의 세상이 동일한 차원에 중첩되어 있어서, 죽은 생명은 몸을 벗어난 추상적 상태가 되었다가 이내 새로운 생명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일찍이 레비스트로스의 답사로 널리 알려진 남미 보로로족의 케자라(Kejara) 취락에서는 마을 가운데 있는 광장에 시신을 가매장하고, 육탈(肉脫)이 이루어지는 몇 주 동안 그곳에서 밤마다 노래와 군무로 죽은 자와 산 자의 어울림을 재현하는 의식을 치렀다. 이후 육탈이 끝나고 남은 유골은 강물에 씻은 뒤, 화려하게 치장하고 바구니에 담아서 호수나 흐르는 냇물 밑바닥에 가라앉혔다. 그들은 망자의 영혼이 스스로의 자아를 상실하고 집합적인 존재인 '아로에(영혼들의 사회)' 속으로 흡수된다고 믿었다.


 이와 비슷한 고고학적 유적으로는 일본 조몬시대 중기(기원전 3500~2500년 전)의 환상취락(環狀聚落)을 꼽을 수 있다. 보로로족이 유골을 다시 꺼내서 물 속에 가라앉힌 것과 달리, 이들은 취락 중앙의 광장에 고정적으로 시신을 매장하였다. 뒤집어 말하자면 산 자의 주거지가 죽은 자를 위한 묘지를 가운데 두고 그 주위에 둥글게 배치되었으며, 따라서 이곳의 일상생활은 항상 죽음의 입회 하에 영위되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나카자와 신이치는 이러한 광장이 산 자의 세상과 죽은 자의 세상이 중첩되는 지점으로서 당시 사람들이 메타인지의 획득으로 느끼게 된 추상적 에너지의 유동과 접촉하는(그의 표현으로는 "초월과 접촉하는") 장소였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기원전 7400~5200년 경에 존재한 아나톨리아 반도의 차탈회위크(Catal-hoyuk) 유적은 이보다도 더욱 노골적이어서, 사람들은 집 한켠의 바닥을 파고 그 자리에 가족의 시신을 묻었다. 이보다 앞서 기원전 8200~7400년 경에 존재한 근처의 아시클리회위크(Asikli-Hoyuk) 유적에서도 같은 매장관습이 보인다. 오늘날의 기준으로는 이러한 매장관습이 경악할 일이지만, 당시 인류에게는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또한 차탈회위크에서 시신은 먼저 독수리가 뜯어먹은 뒤 남은 유골을 추려 매장한 것으로 보이는데, 독수리는 황소와 함께 유적의 각종 상징물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존재이다.


 이러한 관습은 기원전 5000년 경 카르파티아 산맥 동록의 초기 쿠쿠테니-트리폴리예 문화에서도 다소 변형된 상태로 나타난다. 시신은 대개 마을 근처에서 짐승(특히 조류)의 먹이가 되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종종 유골 일부가 집 바닥 아래 있는 의례 매장층에서 발견되고 때로는 유골의 치아를 목걸이에 꿰기도 했다. 기원전 3500년 경에 그 후예('후손'이 아니다)들은 앞에서 보았던 보로로족의 취락을 엄청난 규모로 확장시킨 듯한 대규모 취락을 건설했지만, 시신을 매장하는 관습은 극소수에게만 수용되었고 그조차도 주거지 곁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따라서 이 경우 광장에 시신을 매장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학자들은 지구 반대편에 있는 폴리네시아의 티코피아(Tikopia) 섬에서도 비슷한 매장관습을 보여주는 유적을 찾을 수 있었다. 여기에서는 추장의 상석에서 왼쪽에 위치한 벽을 따라 제단과 무덤이 배치되어 있고, 맞은편에는 화로와 여성들의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이와 달리 트로브리안드 군도의 수도 오마라카나(Omarakana) 취락에서는 일본 조몬시대 중기의 취락처럼 광장이 매장지의 기능을 함께 가지고 있었고, 수장의 거처가 있는 광장의 가장자리를 따라 거주지가 동심원을 그리듯 배치되어 있었다. 다만 둘 가운데 어느 쪽이 초기적 형태인가라는 질문은 지금 단계에서는 무의미할 것이다.


 세계 각지에서 수집된 이 자료들은 인류의 원초적 사고 속에서 '죽음의 세계'가 특별히 분리되어 있지 않았다는 견해를 강화하는 데 충분할 듯하다. 그렇다면 중국의 취락 공동체도 바로 이런 모습으로 시작되지 않았을까? 이와 관련해 주목되는 유적이 기원전 6000년 경의 차하이(査海) 취락이다. 한국에서도 선(先)-홍산문화의 일부로 주목을 끌었던 이 유적은 1만㎡의 대지에서 55기의 주거지와 16기의 묘지가 확인되었는데, 유구의 중복관계와 유물의 선후관계를 고려할 때 전기 · 중기 · 후기로 구분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다만 중기와 후기 사이에는 유구가 중복되지 않고, 토기의 문양도 크게 변화하지 않았으므로 사실상 중기의 토대 위에서 후기로 확장되었다고 보아도 큰 잘못은 아닐 것이다.

 이러한 차하이 취락의 변천과정을 지도에 표시해보면 자못 흥미로운 결과가 도출된다. 전기의 차하이 취락은 묘지가 있는 광장을 둘러싸고 주거지가 둥글게 배치되어 환상취락을 이루고 있지만, 중기에는 주거지가 일정한 방향을 바라보고 몇 겹으로 줄을 지어 늘어서는 병렬식 구조로 바뀌게 되며, 후기에는 매장습속도 집 바닥에 사람을 묻는 것이 두드러지는 것이다. 광장의 크기는 중기와 후기에 걸쳐 지속적으로 줄어들었지만, 그럼에도 이곳에 용 모습 돌무더기[龍形石堆]가 만들어지고 다량의 돼지뼈가 묻힌 구덩이[坑]가 생겨나서 제의 장소로서의 기능이 유지되었음을 보여준다.


 물론 차하이 취락에서 등장한 독특한 열상취락(列狀聚落)과 거실장(居室葬) 조합을 전 중국으로 확대하여 적용하기는 어렵다. 이후 중원에서 나타나는 취락들은 모두 서요하 유역에서 지속된 '열상취락'과 궤를 달리하는 '환상취락' 전통의 연장선상에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차하이 취락은 우리에게 동아시아의 극초기 사회를 환상취락(環狀聚落)과 광장장(廣場葬)이라는 범인류적 현상 속에서 이해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 현대 중국이 차하이 취락에 내건 '중화제일촌'이라는 미칭은 그 자체로 심각한 넌센스지만(다시 말하지만 중원 지역에는 '열상취락'이 없다), 거꾸로 차하이 취락이 중국제일촌('중화'가 아닌)의 모습을 추정 · 재구성하기 위한 가장 가까운 친척으로는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되짚어보면, 고고학적 근거가 부재한 중국 최초의 취락을 재구성하기 위해서는 범인류적 맥락 속에서 그것의 모습을 상상해야만 한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두 기 정도의 외딴 거주지에서 가족 단위의 생활을 했을 것으로 보이지만(차하이 전기와 동시기에 존재한 바이인창한 초기 유적처럼), 그것이 일정한 규모로 모인 마을은 광장을 중심으로 주거지가 원을 그리며 배치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광장은 망자의 묘지인 동시에 살아 있는 사람들의 정신이 세상의 다른 차원, 보이는 것 너머의 실재, 추상적 에너지의 유동과 접촉하는 의식의 장소였을 것이다. 이들이 느끼는 '다른 차원의 세상'은 여러 단어로 치환할 수 있는데, 그 중에서 우리에게 가장 익숙할 단어가 바로 '자연'이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제 갓 정주생활을 시작한 사람들은 아직까지 생자의 영역과 망자의 영역, 문명의 공간과 야생의 공간, 물적인 차원과 영적인 차원을 나누어서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망자의 의지와 야생의 금수와 영적인 존재를 무서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친구로 대접하며 정중히 어울려서 서로에게 호의를 가지고 증여의 순환을 이어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소 비약하면, 이들에게는 아직 전문적인 신령과 샤먼도 존재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가 세상 속에서 동등한 신령이었고, 때문에 누구나 언제든지 신령과 소통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것이 영원히 이어지지는 않았다.


 이 글의 전반적인 관점은 나카자와 신이치(中沢新一), 김옥희 역, 『신의 발명:인류의 지知와 종교의 기원』, 카이에 소바주 시리즈 제4권, 동아시아, 2005, 101~114쪽에 크게 빚지고 있으며, 이것은 다음 화에서도 마찬가지가 될 것이다. 본문에 서술된 조몬시대 중기의 환상취락에 대해서는 앞의 책, 109쪽 참고. 트로브리안드 군도의 환상취락에 대해서는 앞의 책, 110~111쪽 참고.

 보로로족 케자라 취락의 구조에 대해서는 클로드 레비스트로스(Claude Lévi-Strauss), 박옥줄 역, 『슬픈 열대』, 한길사, 1998, 412~414쪽 참고. 케자라 취락에서 이루어진 장례식에 대해서는 앞의 책, 434~435;438~439쪽;442~448쪽 참고. 나카자와 신이치도 상기한 『신의 발명』 111쪽에서 케자라 취락의 구조에 대해 요약적으로 설명하지만, "망자가 매장된 광장"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잘못 인지한 것이거나 지나치게 요약한 것이다. 케자라 취락에서 망자의 유골은 매장이 아니라 수장되었다.

 차탈회위크 유적의 매장관습에 대해서는 남영우, 『도시의 역사』, 푸른길, 2011에 상세한 설명이 있던 것으로 기억하나, 글을 쓰면서 직접 참고하지는 못하였다. 그 대신에 남영우, 「터키 아나톨리아의 先史聚落 차탈휘위크」, 『한국도시지리학회지』 제2권 2호, 1999, 53~54쪽을 참고하여 작성하였다. 차탈회위크와 비교되는 티코피아 섬의 가옥구조에 대해서는 앞의 글, 54쪽 참고.

 쿠쿠테니-트리폴리예 문화의 매장관습에 대해서는 데이비드 W. 앤서니(David W. Anthony), 공원국 역, 『말, 바퀴, 언어』, 에코리브르, 2015, 250:402~403쪽 참고. 기원전 3500년 경에 트리폴리예 문화 사람들이 초거대 환상취락을 이루었던 것은 앞의 책, 404~407쪽에 기술되어 있으며, 앞서 블로그에도 발췌한 바 있다. 존 랭카인 구디(John Rankine Goody), 『Cities before the State in Early Eurasia』, Max Planck Institute for Social Anthropology, 2015, 11쪽에 따르면 이곳의 중앙 광장에서는 매장이나 건축의 흔적을 거의 찾을 수 없었다.

 차하이 취락의 개요로는 박진호, 「요서지역(遼西地域) 초기 신석기문화 연구 : 소하서(小河西) · 흥륭와(興隆窪)문화를 중심으로」 인하대학교 대학원 융합고고학 석사논문, 2014, 54~55;100~102쪽 참고. 시기별 취락 구조에 대해서는 후 호자이(富宝財), 「中国東北地方の新石器時代における社会形態変遷の研究」, 九州大学大学院人文科学府 博士学位論文, 2018, 25~26;132쪽 참고. 묘제에 대해서는 앞의 글, 80~81;94쪽 참고.

○ 케자라 취락의 조감도
 Peter Blundell Jones, 「The Meaning of Use and Use of Meaning」, 『Field』 Volume 1, issue 1, 2007.

○ 조몬시대 중기 환상취락의 평면도
 Mutsuo Nakanishi, 「縄文の心を映すストーンサークル:縄文の円環を訪ねて」, 2015. 10. 10.

○ 차파예프카 취락의 평면도
 David W. Anthony, 「Seeds of Change on the Steppe Borders:Maikop Chiefs and Tripolye Towns」, 『The Horse, the Wheel, and Language』, 2007.

○ 티코피아 섬의 가옥구조 평면도
 남영우, 「터키 아나톨리아의 先史聚落 차탈휘위크」, 『한국도시지리학회지』 제2권 2호, 1999.

○ 오마라카나 취락의 평면도
 René Ohlrau, "Ethnographical parallels? Part 2 - The islands of love and Tripolje", Trypillian "mega-site" research, 2015. 3. 18.

○ 차하이 취락의 평면도
 富宝財, 「中国東北地方の新石器時代における社会形態変遷の研究」, 九州大学大学院人文科学府 博士学位論文, 2018.

중국 고대 도성 발달사 (1) 도성의 탄생 역사 관련 게시물

이 연재는 2018. 8. 18. 개최된 부흥학회 발제 「고대 중국의 도성 경관」의 토론자료를 정리한 것입니다.

 고대 세계는 어떻게 생겨났을까? 농경사회에서 고대 세계는 광대한 야생지대 속에서 군데군데 발생한 자연취락을 바탕으로, 생산이 발달하고 인구가 증가하면서 취락 내 사회가 분업화 · 전업화 · 세습화 · 독점화되고, 취락과 취락 사이에도 격차가 생기면서 상위 취락이 하위 취락을 유형 · 무형으로 종속시키는 장기간의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로써 등장한 초기 국가는 자연스럽게 취락(일부는 도시화가 진전된)들이 야생지대를 가로질러 연결된 네트워크의 모습을 지니게 된다. 즉 도시와 도시가 일정한 경계선을 따라 직접 맞닿고 있는 오늘날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관건은 이러한 '연결'의 성격이 지역에 따라 큰 차이를 보인다는 점이다. 흔히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가 이해하기 쉬운 모델로 회자되지만, 정작 이것은 산악과 바다로 차단된 좁은 공간에 자리하여 연결이 광역적 · 중층적으로 확장되지 못한 특수한 것이었다. 당장 이집트는 물론이고 수메르만 보더라도 전체 수메르의 왕권을 담지한 키쉬(Kish)의 아가 왕이 우루크(Uruk)의 길가메쉬 왕에게 점토의 채굴을 요구하였던 것처럼 광역으로 확장된 연결의 모습이 보이기 때문이다. 이는 중국의 경우에도 같아서 중국사학계에서는 읍제국가(邑制國家)라는 용어로 고대 중국의 누층적 연결 모델을 정의하고 있지만, 이것도 중국에서의 특수한 모델이지 세계사적 보편성을 지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그러면 고대 중국에 있었던 읍제국가의 모습을 춘추시대를 기준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이 당시 취락은 기본적으로 읍(邑)이라는 말로 지칭되었다. 그 가운데 지배자가 거주하는 중심 읍은 국(國)이고, '국'의 바깥에 존재하는 광대한 지역이 야(野)로 통칭되었으며, 이러한 '야'에 점점이 존재하는 소규모 취락이 수취의 대상이 되는 비(鄙)였다. 또한 '비' 사이에는 경대부가 받은 영지의 중심 읍인 도(都)가 있었다. 도읍은 주위의 비읍들과 함께 경대부의 영지인 채읍(采邑)을 이루었을 것이며, 시간이 흐르고 채읍이 성장하면서 경대부가 이러한 채읍을 기반으로 본국을 장악하는 경우도 빈번하게 일어났다.


 따라서 당시에는 국(國)과 도(都)라는 글자의 의미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판이하게 달랐던 것이다. 제후의 '국'과 대부의 '도'는 그들이 주권을 행사하는 중심 취락만을 제한적으로 가리키는 것이었고, 그곳에서 방사되는 정치적 권위는 거리가 멀어지면서 신속하게 약화되었다. 이는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읍과 읍 사이에 상당한 규모의 야생지대가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당시 사람들이 자신이 거주하는 '국'을 야생의 바다에 떠 있는 문명의 섬처럼 여겼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세상을 크게 국(國)과 야(野)로 나누어 보았고, 나중에는 도(都)가 국의 반열에 올라서게 된다.

 이러한 읍제국가 모델이 그 이전 시대에도 적용될 수 있을까? 안양(安陽)에서 나온 상(商)의 유적들은 상나라가 십수 개의 취락들을 연결한 바탕 위에서 도시조직을 구성하고 있었음을 추정하게 한다. 또한 이곳에서 나온 갑골문에는 지방 읍을 다스리는 여러 후(侯)와 백(伯), 그리고 상왕의 정치적 권위 밖에 있는 방(方)의 존재가 빈번하게 등장한다. 즉 당시 중원에는 상나라와 본질적으로 같은 '읍제국가'들이 수없이 존재하고 있었으며, 상은 그 안에서 정치적 권위를 방사하는 하나의 읍제국가였던 것이다. 다만 상의 정치적 권위가 미치는 범위는 (지속적으로 확장되었다고는 해도) 거의 언제나 유동적이었고, 그 경계는 독자적 문화를 향유하는 광범위한 회색지대로 이루어져 있었다.

 비록 세부적인 차이는 있더라도, 상 시대에 읍제국가의 기초가 성립되어 있었다는 결론은 일반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 보인다. 이미 80년대부터 학자들은 주(周) 제도의 여러 본질적인 특징들을 상 시대에 적용시켜 바라보게 되었고, 지금까지도 각종 고고학적 발견이 상 말기와 주 초기 사이에 단속적 변화가 없었다는 관점을 강화해주고 있다. 단 종법제도의 도입과 이에 따른 경대부 계층의 등장이 서주 후기인 기원전 850년대에 비정되므로 이 시기 읍제국가 내부에 도(都)는 존재하지 않았고, 그 대신 읍제국가들이 더욱 자잘하게 분산되어 상호 간에 복잡한 서열관계를 이루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 그조차도 읍제국가의 진정한 기원은 아니다. 고고학적 성과는 이미 신석기시대 후기부터 중원의 취락들이 일정한 국지적인 집단을 형성하고, 그 안에서 취락의 규모와 기능이 지속적으로 분화되어 나갔음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먼저 앙소문화 중기(기원전 4000년 경)에 이르러 취락의 크기 차이가 두드러지게 나타나서, 이 시기의 취락들은 단순 면적으로 90만~30만㎡ 크기의 대형취락, 20만~10만㎡ 크기의 중형취락, 수만~수천㎡ 크기의 소형취락으로 분류할 수 있을 정도가 된다. 그러나 이들은 크기와 무관하게 각각이 모두 자생적인 집단이었고, 그 사이에 어떠한 종속관계를 맺지는 않고 있었다.

 앙소문화 후기(기원전 3500년 경)에는 이러한 취락 간 차이가 단순한 면적을 넘어 기능적 차원으로 발전하였다. 대표적인 것이 동시기 대문구문화에 속하는 안휘성 일원의 위지사(尉遲寺) 취락군으로 10만㎡ 규모의 위지사 중심취락과 3만~1만㎡ 규모의 16개 주변취락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위지사 중심취락이 취락 주위에 환호를 파고 그 안에 대형건물 · 제의시설 · 수공업 작업장 등을 갖추고 있는 데 반해, 여타 주변취락에서는 이러한 시설이 발견되지 않는 것이다. 이는 주변취락의 제의와 정치기능이 중심취락에 집중 · 통합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욱이 이러한 양상은 앙소문화의 서산(西山) 취락군, 홍산문화의 우하량(牛河梁) 취락군 등 비슷한 시기의 다른 취락군에서도 모두 확인할 수 있다.

 이어지는 용산문화 시기(기원전 3000~2000년 경)에는 중심취락이 주변취락에 대해 구성원들을 동원하고 재화를 집중하는 등 더욱 강한 통제력을 행사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에는 이전까지 환호와 목책으로 방어되던 취락의 외연에 본격적으로 성곽이 축조되는데, 이렇게 세워진 중심취락의 성곽들은 중심취락 자체의 역량만으로는 건설하기 어려운 규모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중심취락의 기능과 위상이 지속적으로 강화되고, 서로 다른 취락군의 중심취락 사이에도 사회적 연결망이 성립되면서 이리두문화 단계(기원전 1900~1500년 경)에 이르러 중원에는 초보적인 '국가'와 함께 그 동전의 양면이라 할 수 있는 '도성'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이제부터는 국가 성립 이전에 도성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취락 내 구조가 어떻게 되어 있었는지, 또한 그러한 구조상의 특이성이 당대인들의 사고방식을 어떻게 반영하고 있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여기에 지구상의 다른 지역과 다른 사회를 비교하면서 인류학적 관점을 조금 가미한다면, 이 시기 중국의 취락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더 원초적이고 보편적인 정신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나아가 이러한 원시적인 취락 구조와 그 기저의 정신이 국가의 성립과 함께 단속적으로 사라지지 않고, 그 이후에도 흔적기관(vestigial organ)으로 남아 점진적으로 바뀌어갔음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



 고대사회를 광대한 야생지대 가운데 고립되어 있는 취락과 그 연결로 보는 관점은 권오중, 「點과 線의 고대사:중국 동북 '濊貊'의 경우」, 『인문연구』 제60호, 영남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10 참고. 필자의 이러한 이미지는 자크 르 고프(Jacques Le Goff), 유희수 역, 『서양 중세 문명』, 문학과지성사, 1994, 155~157쪽에서 묘사된 유럽 중세사회의 모습에서 상당한 영감을 받았으며, 이것이 중국의 고대사회에 적용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키쉬의 아가 왕이 우루크의 길가메쉬 왕에게 점토의 채굴을 요구한 사건은 김산해, 『최초의 신화 길가메쉬 서사시』, 휴머니스트, 2008, 201쪽 참고. 이 사건 당시에 키쉬가 전체 수메르의 왕권을 담지하고 있었던 사실은 앞의 책, 437쪽 참고. 이 사건으로 촉발된 전쟁에서 우루크를 침공한 키쉬가 패배하면서 전체 수메르의 왕권은 길가메쉬 왕에게로 넘어갔다.

 춘추시대 읍제국가라는 용어와 구조에 대한 이해는 이성구, 「春秋戰國時代의 國家와 社會」, 『講座 中國史 Ⅰ:古代文明과 帝國의 成立』, 서울대학교동양사학연구실, 2004, 92~105쪽을 참고. 1989년에 초간되어 최신 연구성과와 상충되지는 않는지 의문이지만, 이처럼 분명하게 읍제국가의 구조를 조감한 저술은 필자가 확인하지 못하였다. 같은 내용이 요약된 설명으로는 신성곤 · 윤혜영, 『한국인을 위한 중국사』, 서해문집, 2004, 32~33;37쪽을 참조.

 상 왕조의 후기 수도로 은허(殷墟)로 잘 알려진 안양의 도시조직에 대한 이해는 장광즈(張光直), 윤내현 역, 『商文明』, 민음사, 1989, 167~168;173~174쪽 참고. 특히 안양 일대의 유적을 도식화한 지도는 앞의 책, 173쪽에서 거의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상의 전체적 지배구조와 성격에 대해서는 앞의 책, 271~286;322~323쪽과 함께 김한규, 『천하국가』, 소나무, 2005김정열, 『서주 국가의 지역정치체 통합 연구』, 서경문화사, 2012를 참조.

 고고학적 증거를 기반으로 상 말기와 주 초기 사이의 단속적 변화에 대해 회의적인 견해는 로타 본 팔켄하우젠(Lothar von Falkenhausen), 심재훈 역, 『고고학 증거로 본 공자시대 중국사회』, 세창출판사, 2011, 34;88~96;244~246쪽 참고. 종법제도의 도입을 서주 후기인 기원전 850년대로 비정하는 견해는 앞의 책, 110~117쪽 참고.

 신석기시대 후기 중원에서 취락의 규모와 기능이 분화되는 과정에 대해서는 오강원, 「遼寧 地域의 靑銅器·初期 鐵器時代 複合社會의 形成과 社會 變動」, 『先史와 古代』 제38호, 2013, 164~166쪽 참고. 또한 김정열, 『서주 국가의 지역정치체 통합 연구』, 서경문화사, 2012이청규, 「동아시아에서 문명의 기원과 국가의 형성」, 『동아시아의 역사』, 동북아역사재단, 2011의 내용도 참조하였다. 전자는 블로그에 발췌되어 있으며, 후자는 동북아역사넷(contents.nahf.or.kr)에서 열람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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