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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제가 63세에 남긴 생전 유조 (해설 첨부) 역사 관련 게시물



○ 신미일

황상께서 황태후궁에 나아가 문안하시었다. 황상께서 건청궁 동난각에 임어하시어 여러 황자들과 만한대학사 · 학사 · 구경 · 첨사 · 과도 등을 소집하시고, 들자 하유하시었다.

짐은 어린시절 하늘이 건강함을 주셔서 여태 질병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였는데, 이번 봄에 처음으로 병이 들어서 머리가 어지럽고 점차 쇠약해지는 것을 깨달았다. 가을달에 이르러 새외에서 몽골 지방을 둘러보니, 물과 땅이 몹시 좋아서 정신이 날로 건강해지고 얼굴에 더 살이 올랐다. 매일같이 말을 달리며 활을 쏘았지만 역시 힘들거나 싫증이 나지 않았다. 수도로 돌아온 뒤에는 황태후께서 편치 않으시므로 심신이 초췌하고 머리가 어지러움이 빈발함이 있었다. 짐이 평소에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었던 것을, 이제 특별히 그대들을 모아서 얼굴을 마주보고 하유한다.

지금까지 제왕들은 천하를 다스림에 하늘을 받들고[敬天] 조상을 본받음[法祖]을 으뜸가는 일로 삼지 않음이 없었다. 하늘을 받들고 조상을 본받는 것의 실제는 먼 곳을 보듬고 가까운 곳을 순종시키며[柔遠能邇] 모든 생명에게 휴식을 부여하여서[休養蒼生], 사해의 이익을 공유하는 것을 이로움으로 삼고 천하의 민심을 일치시키는 것을 마음으로 삼아, 뭇 신하 · 서민들과 마주하며 위태로워지기 전에 나라를 지키고[保邦於未危] 어지러워지기 전에 치세를 이루는[致治於未亂] 것이니,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힘쓰고 또 힘써서 자나깨나 나태하지 않으며, 관대함과 엄격함을 서로 보완하고 정도와 권도를 서로 사용하여서 국가의 장구한 계책을 도모할 따름이니라.

예로부터 천하를 얻은 정당함이 우리나라만한 적이 없었다. 태조와 태종께서는 당초 천하를 얻으려는 마음이 없으셨으니, 일찍이 군대가 경성에 다다라서 여러 대신들이 모두 아뢰길 '마땅히 취해야 한다'고 아뢰자, 태종황제께서는 '명과 우리나라는 평소 화친하지 않았으니, 지금 그를 취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다만 중국의 군주를 생각하여 차마 취하지 못하는 것이다'라고 하시었다. 뒤에 떠도는 도적 이자성이 경성을 공파하고 숭정이 자결하자, 신민이 서로 이끌고 와서 맞이하였다. 이에 도적을 소탕하고 들어가 대통을 계승하였다.

옛날 항우가 거병하여 진을 공격하였으나 나중에는 천하가 끝내 한나라에게로 돌아갔는데, 처음에 한 고조는 사수의 일개 정장일 따름이었다. 원나라 말에는 진우량 등이 나란히 봉기하였으나 나중에는 천하가 끝내 명나라에게로 돌아갔는데, 처음에 명 태조는 황각사의 일개 승려일 따름이었다. 우리나라는 선열들의 자리를 이어받고, 하늘에 응하며 사람을 따르고, 구역을 어루만졌으니 이로써 난신적자를 보고 참된 주인을 위하여 제거하지 않음이 없을 따름이었다.

이제 짐의 나이가 장차 칠순이요, 재위한 지 50여 년인데, 실로 천지종사의 말 없는 보우에 힘입었던 것이지 짐의 박덕으로 이룩한 바가 아니었다. 짐은 어려서부터 독서로 고금의 도리를 대략 깨우칠 수 있었다. 무릇 제왕은 저마다 천명이 있음이니 마땅히 장수할 사람을 장수하지 못하게 할 수가 없고, 마땅히 태평할 사람을 태평하지 못하게 할 수가 없다. 황제 갑자년으로부터 지금까지 4350여 년이요, 황제를 칭한 자는 300여 명이 된다. 다만 진나라의 분서 이전과 삼대의 일을 전부 믿을 수는 없다. 시황제 원년에서 지금까지 1960여 년이고 칭제건원한 자는 211명이다.

짐은 어떠한 사람인가? 진한 이래 오래도록 재위한 사람으로는 짐이 으뜸이다.

옛 사람 이래로 다투지 않음을 숭상하고, 족한 줄 알고 그칠 줄 아는 자가 처음처럼 끝을 보전할 수 있었다. 삼대 이후 제왕을 살펴보면, 왕위에 오래 앉은 자는 유조를 후세에 남기지 못하였고, 수명이 길지 않았던 자는 천하의 질고를 알지 못하였다. 짐은 이제 늙었고, 자리에 있은 지도 오래되었다. 후인들이 어떻게 평가할지는 점치기 어려운데다, 또한 눈앞의 일에 통곡하며 눈물을 뿌리지 않을 수 없다. 미리 붓 가는 대로 스스로 써두지만 오히려 천하가 내 고충을 알지 못할까 두렵다. 예로부터 제왕들은 대부분 죽음을 꺼리는 일로 삼아서, 매번 그 유조를 살펴보면 제왕의 말투가 아니고, 또 심중에서 말하고자 한 바도 아니다. 이는 다 정신이 흐릿한 때 문신을 찾아서 임의로 헤아려 짓게 한 것이다.

짐은 그러지 않을 것이다. 지금 미리 너희들에게 짐의 피어린 정성을 알게 하리라.

제위에 오른 지 20년이 되던 날에는 감히 30년까지 헤아리지 못하였고, 30년에는 40년까지 헤아리지 못하였는데, 이제는 어느새 57년이 되었다. 『상서』「홍범」에 기재된 바, 첫째가 장수하는 것[壽]이요, 둘째가 풍요로운 것[富]이요, 셋째가 심신이 안온한 것[康寧]이요, 넷째가 덕을 좋아하는 것[攸好德]이요, 다섯째가 제 명을 다 누리는 것[考終命]이라 하였다. 다섯 복 가운데 제 명을 다 누리는 것을 다섯번째에 둔 것은 진실로 그것을 얻기가 어려운 때문이다.

지금 짐의 나이가 장차 칠십이고, 자 · 손 · 증손이 150여 명이고, 천하는 대략 안정되어 사해가 평화롭다. 비록 풍속을 올바르게 고치고 모든 사람을 풍족하게 하지는 못하였으나, 다만 힘쓰고 또 힘쓰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면서, 조심하고 삼가하여 자나깨나 나태하지 않고 일찍이 조금도 해이해지지 않았다. 수십 년 동안 하루같이 온 마음과 온 힘을 다하였으니, 이것을 어찌 노고라는 두 글자에 다 담아낼 수 있겠느냐?

전대의 제왕 가운데 혹 향년이 길지 않았던 자가 있으면 사관의 논찬에서 '오만방자하여 주색에 탐닉하다 그리되었다'고 하지만, 이는 다 서생들이 잘못을 비평하길 좋아하여 순수하게 뛰어난 임금이라도 반드시 옥의 티를 찾아서 들추는 것이다. 짐이 전대의 제왕을 위해 반박하면, 대개 천하의 일이 번잡함으로 말미암아 피로를 이기지 못하고 그리되었던 것이다. 제갈량이 이르길, '엎드려 힘을 다하고 죽은 뒤에야 쉰다[鞠躬盡瘁 死而後己]'고 하였는데, 신하된 자로는 오로지 제갈량 한 사람 뿐이다. 제왕이 지는 짐은 몹시 무거운데다 곁에 맡길 수도 없으니, 어찌 신하와 비교할 수 있겠느냐?

신하들은 임관할 수 있으면 임관하고, 사직할 수 있으면 사직하고, 나이가 들면 사직하고 돌아가 자식을 안고 손자들과 놀면서 유유자적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임금된 자는 고단한 일생을 살면서 휴식도 없다! 순 임금은 무위(無爲)로 다스렸다고 말해지지만, 그럼에도 남방을 돌다가 창오에서 죽었다. 우 임금은 온갖 탈것을 타고 손에 못이 박히고 발이 부르트게 돌아다니다 회계에서 죽었다. 이처럼 모두 정무에 부지런히 힘쓰고 두루 순행하여 휴식하며 나태하지 않았으니, 어찌 무위청정을 숭상하여 자신을 보전했다고 하겠느냐?

『역』의 돈(豚)괘 6효는 군주된 자의 일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으니, 군주는 본래부터 안식할 곳이 없고, 물러나 숨을 수도 없음을 볼 수 있다. '엎드려 힘을 다한다[鞠躬盡瘁]'는 것은 진실로 이를 이르는 것이다.

옛 사람들은 매양 '제왕은 대강(大綱)에 힘쓰고, 세무(細務)까지 아우를 필요가 없다' 하였는데, 짐은 마음속으로 그렇게 여기지 않는다. 하나의 일이라도 부지런하지 않으면 곧장 사해에 근심을 끼치고, 일순간이라도 부지런하지 않으면 천백세에 근심을 끼치고, 작은 일을 살피지 않으면 종내는 큰 덕에 누를 끼친다. 고로 짐은 매사를 반드시 더욱 상세하게 살피었다. 오늘 한두가지 일을 처리하지 않고 보류해둔다면 내일 한두가지 일이 많아지는 것과 같고, 내일도 다시금 편안하고 한가로운 데 힘쓴다면 뒷날에는 산적한 일이 더욱 많을 것인데, 임금의 일은 지극히 중요하여 진실로 미루기 어렵다.

고로 짐은 크고 작음을 막론하고 정무에 힘쓰며 주장에 한 글자라도 잘못이 있으면 반드시 고쳐서 돌려주었으니, 모든 일에 소홀하지 못하는 것은 내 천성이 그러하다. 50여 년 동안 매번 일이 생기기 앞서 대비하였고, 사해의 수많은 사람들도 모두 짐의 덕을 받들고 있으니, 어찌 '세무까지 아우를 필요가 없다'는 말을 고집하겠느냐?

짐은 어려서 강건하고 근력도 자못 좋아서 15력의 활을 당기고 13줌의 화살을 쏘았으며, 용병과 전쟁하는 일에도 모두 뛰어났다. 그러나 평생토록 한 사람도 망령되이 죽이지 아니하였고, 삼번을 평정하고 막북을 청소하는 데에도 모두 한결같은 마음으로 궁리하였다. 호부의 재정은 군무와 진휼이 아니고서는 망령되이 쓰지 않았으니, 이는 모두 민중의 고혈이기 때문이다. 순행하는 바에는 행궁에 채견을 치지 않았고 지역마다 쓰는 것도 1~2만 금을 넘지 않았으니, 하공(河工)에 해마다 쓰는 300여 만의 비용과 견줘보면 오히려 그 백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한다.

어린 나이에 독서하면서 음주와 여색을 경계해야 하는 것과 소인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서 노인이 되도록 병들지 않았던 바이나, 강희 47년(1708)에 크게 병들었던 뒤로 심신이 지나치게 상하여 그 전만 못하게 되었다. 게다가 날마다 임금이 해야 할 일이 있어서 모두 결재해야 하니, 밖으로는 날마다 정신이 달아나고 안으로는 심혈이 때때로 소모되는 것을 매번 깨달았다. 앞으로 어쩌다 한때의 변고를 당하여 말도 한 마디 남기지 못하게 된다면, 나의 속마음을 토로하지 못하게 될 것이니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그러니 미리 정신이 맑을 때 하나하나 말해두어, 일생의 일을 다 그리할 수 있다면 어찌 장쾌하지 않겠는가?

사람이 태어남이 있으면 반드시 죽음도 있으니, 주자(朱子)의 말처럼 천지가 순환하는 이치는 낮과 같고 밤과 같은 것이다. 공자께서는 '평이한 곳에 있으며 천명을 기다리라[居易以俟命]'고 하였으니, 모두 성현의 큰 도리이다. 무엇하러 두려워하겠는가?

요사이 병이 많아서, 심신이 혼매하고 신체가 피로하니 움직이기 위해서는 남이 부축해주지 않으면 걸음조차 떼기 어렵다. 그해 천하를 나의 임무로 삼기로 마음을 세웠으니 죽은 뒤라도 나의 뜻을 이룬다면 좋을 터인데, 지금 짐이 몸에 가지고 있는 병은 공황증과 건망증이어서 옳고 그름이 전도되어 임금의 일이 착란될까 몹시 두렵다. 마음은 천하를 위하다가 피가 마르고, 정신은 사해를 위하다가 형체가 흩어졌다. 곧 정신은 몸을 지키지 못하고, 마음은 즐거움을 잃어버리고, 눈은 멀고 가까움을 판단하지 못하고, 귀는 옳고 그름을 분별하지 못한다. 먹는 것은 적은데 일은 많으니, 어찌 장구할 수 있겠느냐?

더욱이 평화로운 날이 오래도록 이어지면 사람들의 마음이 해이해져서, 복이 소진되고 화가 다다르며, 안정됨이 떠나가고 비루함이 찾아든다. 우두머리가 잡인들을 모아들이면 중신들이 타성에 젖어 만사가 어그러지고, 나중에는 반드시 하늘의 재앙과 사람의 해로움을 부르다가, 난잡하게 모두 닥치면 마음으로 여유가 있어도 정신으로는 겨를이 없어서 후회막급이 된다. 떨치고 일어나도 일어나지질 않고, 침상에서 신음하다가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하니, 죽지 않으면 어찌 통탄스럽지 않겠는가?

옛적 양 무제도 창업의 영웅이었지만, 이후 노년에 이르러서는 후경의 핍박을 받아 마침내 대성(臺城)의 화를 입었다. 수 문제도 개창의 군주였지만, 그 아들 양제의 악함을 미리 알지 못하여 끝내 제 명을 다하지 못하였다. 또 단약에 중독되어 자살하고, 식사하다가 떡을 삼키고, 송 태조의 멀리서 촛불에 그림자가 보인 따위의 일들은 하나하나 다 기록에 실린 의심스런 사건들인데, 어찌 전철이 되지 않겠는가? 모두 판단이 늦어진 데서 말미암았고, 또 정책과 민생에는 이익이 없는 것이다.

한 고조는 여후에게 유명을 전하고 당 태종은 장손무기와 후사를 정하였는데, 짐은 언제나 이를 보면서 깊이 부끄러운 일로 여겼다. 어떤 소인들은 갑작스러운 기회를 바라서, 폐위하고 세우는 일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면 한 사람을 추대하여 훗날의 이익을 기대한다. 짐이 숨쉬는 한 어찌 이런 자들을 용납할 수 있겠느냐?

짐이 태어남에 신령하거나 기이한 일이라고는 없었고, 자라서도 역시 비상한 일은 없었다. 여덟 살에 왕위에 올라 지금까지 57년, 사람들로 하여금 상서로운 조짐을 말하지 못하게 하였는데 역사책에 실린 바 상서로운 별 · 경사스런 구름 · 기린이나 봉황 · 향기로운 풀 따위의 경사라던가, 궁전 앞에서 타오르는 옥구슬 · 하늘에서 내려온 예언서 따위이다. 이는 모두 허황된 글이니, 짐은 감히 그러지 못하겠다. 그저 날마다 예사롭게 진실한 마음으로 진실한 정치를 했을 뿐이다.

지금 신하들은 후사를 세워서 정무를 나누라고 주청하는데, 이는 짐에게 갑작스런 변고가 있을 것을 염려하는 것일 뿐이다. 죽고 사는 것은 항상된 도리로서 짐은 이를 꺼리지 않는다. 다만 천하의 대권은 마땅히 하나로 합쳐야 한다. 10년 이래로 짐은 행한 일과 품은 마음을 모두 적어서 봉인해 두었는데, 이는 끝나지 않고 있다. 후사를 세우는 것은 큰일인데 짐이 어찌 잊었겠느냐?

천하의 왕좌는 지극히 중요해서, 만일 이를 내려놓고 편안히 노닐고 즐기면서 한 가지 일에도 마음이 시달리지 않는다면 더 오래 살아가는 것도 바랄 만할 것이다. 여러 신하들이 짐의 깊은 은혜를 입었거늘, 어찌 짐으로 하여금 쉬는 날을 가지라고 말하는가? 짐은 이제 혈기가 감쇠해서도 힘써 지탱하고 있다. 벗어났다가 임금의 일을 그르치게 된다면, 종전까지 57년을 근심하며 부지런한 것이 아깝지 않겠느냐? 짐의 고충과 정성이 이처럼 한결같다.

늙은 신하들이 은퇴를 청하는 상소를 살필 때마다 눈물이 나지 않은 적이 없다. 너희들은 은퇴하는 정년이라도 있지, 짐은 어디서 휴식할 수 있단 말이냐? 단지 수십 일이라도 휴양하고 보전하다가 명을 다 누리면, 죽고사는 짐의 기쁨을 어떻게 말로 다할 수 있겠느냐? 앞으로도 세월은 유구한데, 혹 송 고종의 나이처럼 될 지는 알 수 없도다.

짐의 나이 57세에 바야흐로 흰 터럭이 몇 가닥 있었는데, 검은 수염 약을 진상하는 자가 있었다. 짐은 웃으며 그것을 물리고는 '고래로 수염이 하얀 황제가 얼마나 있었던가? 짐이 수염이 온통 희게 된다면, 어찌 만세토록 미담이 되지 않겠느냐?'하였다. 초기에 짐과 함께 일을 보던 자들은 이제 한 사람도 없고, 뒤에 새로운 품계로 승진한 자들이 함께 공경하고 협력하면서 공정함을 받들고 법을 지키고 있다. 흰 머리가 조정에 가득한지 오래되었다 이를 만하니, 역시 만족스러운 일이다.

짐은 천하의 존귀함과 사해의 부유함을 누렸으며, 가져보지 못한 물건이 없고 겪어보지 못한 일도 없다. 늘그막에 이르게 되자 너그러운 생각을 품거나 잠시도 쉬지 못하게 되자, 고로 천하를 버리는 것을 해진 신처럼 생각하고, 부귀를 진흙과 모래처럼 생각하게 되었다.

되도록 무사히 생을 마치는 것! 짐의 바람은 그것으로 족하다. 바라건대 너희들 대소 신료들은 짐이 50여 년을 태평한 세상의 천자였음을 기억하라. 간절하고 진실되게 반복하는 고충은 내가 가진 생이 제 명을 다 누리고 끝나는 것이다.

이 유지는 10년 동안 준비해온 것이다. 만약 유조가 나오더라도, 여기서 언급되지 않은 말은 없을 것이다. 간장을 후벼파고 쓸개를 드러내듯 오장을 다 털어놓았다.

짐은 말을 거듭치 않겠다.




해설 (조너선 D. 스펜스, 41~42/270~273쪽 참고)

이 글은 양력으로 1717년 12월 23일, 양력으로 강희 56년 11월 21일에 강희제 자신이 내린 생전 유조를 완역한 것이다. 조너선 D. 스펜스는 이 글을 '고별사(farewell speech)'로 지칭하고, 이준갑은 이 단어를 '고별 상유(上諭)'로 번안하였지만, 강희제가 스스로 말하는 것처럼 이 글은 차라리 '유언장(will)'에 더 가깝다. 따라서 필자는 일관되게 '생전 유조'라는 말을 쓸 것이며, 또 그렇게 쓰기를 제안한다. 그의 사후에 실제로 발표된 '사후 유조'는 이것을 가위질하여 재조직한 판본인데, 흥미롭게도 청실록에는 두 판본이 모두 수록되어 있어서 직접적인 비교가 가능하다.

이 글은 강희제가 자신의 손으로 쓴 간단한 회고록이자 자서전이고, 압축된 유훈집이자 에세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의 황제:강희의 자화상(Emperor of China:Self-portrait of K'ang-hsi)』에서 강희제의 눈으로 그의 생을 재구성한 조너선 D. 스펜스는 서두에서 자신의 저서가 이 유조를 골자로 재구성한 200여 쪽(한국어판 기준)짜리 확장판이라 이야기하는데, 이 유조의 풍부한 맥락과 진솔한 표현은 과연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 이 유조는 성군이라는 단순한 이해를 넘어 고뇌하고 힘겨워하며, 그럼에도 이따금 번창하는 세상의 모습 속에서 자신의 역할에 보람을 느낀 한 인간의 이야기이다.

얼마 뒤, 유조의 사본을 나누어 보관하도록 지시하면서 강희제는 "짐이 일생의 일을 선사(繕寫)한 것은 10년 동안 준비한 것이다. '짐은 말을 거듭치 않겠다'고 한 말에서 이미 그것을 다하였다"(청실록 1717년 12월 25일)는 말로 신하들이 이 유조에 말을 더하지 못하도록 강력히 가로막았다. 이런 강희제의 걱정도 기우가 아니었다. 그의 사후 반포된 유조는 그가 생전에 남긴 유조에서 인간적인 고통을 거세해버렸고, 훈계와 당부하는 말도 앞뒤로 뒤섞었다. 그래서 사후 유조는 비록 장엄하게 꾸며졌지만, 힘들었던 과정은 외면하고 화려한 결과만 자랑하는 오만하고 가식적인 글이 되어버렸다.

그의 사후 편집되면서 사라진 부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올해 봄에 이르러 자신의 노쇠함을 체감하게 되었다는 서두.
자신이 분서갱유 이래 그 누구보다도 오래 재위했다는 언급.
살아있는 동안 유조를 남겨 자신의 진심을 전하고 싶은 바람.

이 시대를 일구는 데 기울인 고생과 그를 인정받고 싶은 바람.
황제는 쉬지도 못하고 은퇴도 없는 데 대한 퉁명스러운 토로.
좋은 황제는 대강만이 아니라 세무에도 힘써야 한다는 주장.

노쇠하면서 나타난 신체적 증상과 정신력 감퇴에 대한 호소.
비정상적 제위 계승의 역사적 사례와 그 교훈을 지적한 부분.
황제에 의한 상서와 기적 따위에 대한 회의적인 진솔한 언급.

휴식을 갈망하지만 차마 그만두지도 못하는 모순된 양가감정.
자신은 쉬지 못하지만 길고 평화로운 치세를 보는 자기만족.
이 모두가 기억되길, 유조가 존중되길 바라는 고뇌에 찬 바람.

강희제는 생전의 유조에서 다소 모순되고(서두와 중반이 상충되는 건강에 대한 언급) 반복되고(쉬지 못하는 군주의 책무에 대한 불평) 과장된(군주의 업무에 대한 극단적 성실) 부분이 있을지언정, 자신을 고뇌하고 고통스러워하는 한 인간으로 드러내고자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황제의 인간적인 면모를 지우고 그저 존엄하게만 만들어버리는 역사적 전통 속에서 과연 그 자신이 있는 그대로 기억될 수 있을지 의심스러워하고 있었다. 그의 사후 재편집된 유조는 강희제의 의심이 타당한 것이었음을 보여준다. 여기에는 강희제가 단지 윤곽으로만 나타나고, 그 안에는 중국의 고전적 영웅상에 부합하는 물감만이 칠해질 수 있었다.

다행스러운 점은, 그러한 정치적인 판단이 역사적 차원에까지 다다르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당대 역사가들은 강희제가 생전에 남긴 곡진한 당부에 따라, 혹은 사료 취사의 기계적 중립성을 발휘하여 유조의 두 가지 판본을 모두 실록에 실어놓았다. 그런 덕분에 강희제의 진심은 한동안 중국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진 대신 화약 냄새 가득한 250년의 긴 시간을 성공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지구 반대편의 역사가에 의해 다시 발견되고 번역되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정보망으로 퍼져나가서 그보다 더 오랜 세월을 살아나갈 수 있는 생명력을 얻었다.

300년 후, 강희제 스스로 원래의 유언을 말하게 한 것은 역사가에게 즐거운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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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고대 도성 발달사 (2) 중국 최초의 취락을 찾아서 창고

이 연재는 2018. 8. 18. 개최된 부흥학회 발제 「고대 중국의 도성 경관」의 토론자료를 정리한 것입니다.

 오늘날 인류는 거의 강박적으로 생(生)과 사(死)의 거리를 최대한 멀리 떨어뜨리려 한다. 당장 한국을 보아도 매장지는 도시로부터 멀리 떨어진 산 속에 마련되어 있으며, 화장장 역시 지역사회의 거센 반발을 사는 대표적인 기피시설이다. 하지만 정작 인류의 원초적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취락들을 살펴보면 그들이 의도적이고 논리적으로 생과 사의 거리를 인식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그들의 인식 속에서는 산 자의 세상과 죽은 자의 세상이 동일한 차원에 중첩되어 있어서, 죽은 생명은 몸을 벗어난 추상적 상태가 되었다가 이내 새로운 생명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일찍이 레비스트로스의 답사로 널리 알려진 남미 보로로족의 케자라(Kejara) 취락에서는 마을 가운데 있는 광장에 시신을 가매장하고, 육탈(肉脫)이 이루어지는 몇 주 동안 그곳에서 밤마다 노래와 군무로 죽은 자와 산 자의 어울림을 재현하는 의식을 치렀다. 이후 육탈이 끝나고 남은 유골은 강물에 씻은 뒤, 화려하게 치장하고 바구니에 담아서 호수나 흐르는 냇물 밑바닥에 가라앉혔다. 그들은 망자의 영혼이 스스로의 자아를 상실하고 집합적인 존재인 '아로에(영혼들의 사회)' 속으로 흡수된다고 믿었다.


 이와 비슷한 고고학적 유적으로는 일본 조몬시대 중기(기원전 3500~2500년 전)의 환상취락(環狀聚落)을 꼽을 수 있다. 보로로족이 유골을 다시 꺼내서 물 속에 가라앉힌 것과 달리, 이들은 취락 중앙의 광장에 고정적으로 시신을 매장하였다. 뒤집어 말하자면 산 자의 주거지가 죽은 자를 위한 묘지를 가운데 두고 그 주위에 둥글게 배치되었으며, 따라서 이곳의 일상생활은 항상 죽음의 입회 하에 영위되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나카자와 신이치는 이러한 광장이 산 자의 세상과 죽은 자의 세상이 중첩되는 지점으로서 당시 사람들이 메타인지의 획득으로 느끼게 된 추상적 에너지의 유동과 접촉하는(그의 표현으로는 "초월과 접촉하는") 장소였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기원전 7400~5200년 경에 존재한 아나톨리아 반도의 차탈회위크(Catal-hoyuk) 유적은 이보다도 더욱 노골적이어서, 사람들은 집 한켠의 바닥을 파고 그 자리에 가족의 시신을 묻었다. 이보다 앞서 기원전 8200~7400년 경에 존재한 근처의 아시클리회위크(Asikli-Hoyuk) 유적에서도 같은 매장관습이 보인다. 오늘날의 기준으로는 이러한 매장관습이 경악할 일이지만, 당시 인류에게는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또한 차탈회위크에서 시신은 먼저 독수리가 뜯어먹은 뒤 남은 유골을 추려 매장한 것으로 보이는데, 독수리는 황소와 함께 유적의 각종 상징물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존재이다.


 이러한 관습은 기원전 5000년 경 카르파티아 산맥 동록의 초기 쿠쿠테니-트리폴리예 문화에서도 다소 변형된 상태로 나타난다. 시신은 대개 마을 근처에서 짐승(특히 조류)의 먹이가 되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종종 유골 일부가 집 바닥 아래 있는 의례 매장층에서 발견되고 때로는 유골의 치아를 목걸이에 꿰기도 했다. 기원전 3500년 경에 그 후예('후손'이 아니다)들은 앞에서 보았던 보로로족의 취락을 엄청난 규모로 확장시킨 듯한 대규모 취락을 건설했지만, 시신을 매장하는 관습은 극소수에게만 수용되었고 그조차도 주거지 곁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따라서 이 경우 광장에 시신을 매장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학자들은 지구 반대편에 있는 폴리네시아의 티코피아(Tikopia) 섬에서도 비슷한 매장관습을 보여주는 유적을 찾을 수 있었다. 여기에서는 추장의 상석에서 왼쪽에 위치한 벽을 따라 제단과 무덤이 배치되어 있고, 맞은편에는 화로와 여성들의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이와 달리 트로브리안드 군도의 수도 오마라카나(Omarakana) 취락에서는 일본 조몬시대 중기의 취락처럼 광장이 매장지의 기능을 함께 가지고 있었고, 수장의 거처가 있는 광장의 가장자리를 따라 거주지가 동심원을 그리듯 배치되어 있었다. 다만 둘 가운데 어느 쪽이 초기적 형태인가라는 질문은 지금 단계에서는 무의미할 것이다.


 세계 각지에서 수집된 이 자료들은 인류의 원초적 사고 속에서 '죽음의 세계'가 특별히 분리되어 있지 않았다는 견해를 강화하는 데 충분할 듯하다. 그렇다면 중국의 취락 공동체도 바로 이런 모습으로 시작되지 않았을까? 이와 관련해 주목되는 유적이 기원전 6000년 경의 차하이(査海) 취락이다. 한국에서도 선(先)-홍산문화의 일부로 주목을 끌었던 이 유적은 1만㎡의 대지에서 55기의 주거지와 16기의 묘지가 확인되었는데, 유구의 중복관계와 유물의 선후관계를 고려할 때 전기 · 중기 · 후기로 구분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다만 중기와 후기 사이에는 유구가 중복되지 않고, 토기의 문양도 크게 변화하지 않았으므로 사실상 중기의 토대 위에서 후기로 확장되었다고 보아도 큰 잘못은 아닐 것이다.

 이러한 차하이 취락의 변천과정을 지도에 표시해보면 자못 흥미로운 결과가 도출된다. 전기의 차하이 취락은 묘지가 있는 광장을 둘러싸고 주거지가 둥글게 배치되어 환상취락을 이루고 있지만, 중기에는 주거지가 일정한 방향을 바라보고 몇 겹으로 줄을 지어 늘어서는 병렬식 구조로 바뀌게 되며, 후기에는 매장습속도 집 바닥에 사람을 묻는 것이 두드러지는 것이다. 광장의 크기는 중기와 후기에 걸쳐 지속적으로 줄어들었지만, 그럼에도 이곳에 용 모습 돌무더기[龍形石堆]가 만들어지고 다량의 돼지뼈가 묻힌 구덩이[坑]가 생겨나서 제의 장소로서의 기능이 유지되었음을 보여준다.


 물론 차하이 취락에서 등장한 독특한 열상취락(列狀聚落)과 거실장(居室葬) 조합을 전 중국으로 확대하여 적용하기는 어렵다. 이후 중원에서 나타나는 취락들은 모두 서요하 유역에서 지속된 '열상취락'과 궤를 달리하는 '환상취락' 전통의 연장선상에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차하이 취락은 우리에게 동아시아의 극초기 사회를 환상취락(環狀聚落)과 광장장(廣場葬)이라는 범인류적 현상 속에서 이해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 현대 중국이 차하이 취락에 내건 '중화제일촌'이라는 미칭은 그 자체로 심각한 넌센스지만(다시 말하지만 중원 지역에는 '열상취락'이 없다), 거꾸로 차하이 취락이 중국제일촌('중화'가 아닌)의 모습을 추정 · 재구성하기 위한 가장 가까운 친척으로는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되짚어보면, 고고학적 근거가 부재한 중국 최초의 취락을 재구성하기 위해서는 범인류적 맥락 속에서 그것의 모습을 상상해야만 한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두 기 정도의 외딴 거주지에서 가족 단위의 생활을 했을 것으로 보이지만(차하이 전기와 동시기에 존재한 바이인창한 초기 유적처럼), 그것이 일정한 규모로 모인 마을은 광장을 중심으로 주거지가 원을 그리며 배치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광장은 망자의 묘지인 동시에 살아 있는 사람들의 정신이 세상의 다른 차원, 보이는 것 너머의 실재, 추상적 에너지의 유동과 접촉하는 의식의 장소였을 것이다. 이들이 느끼는 '다른 차원의 세상'은 여러 단어로 치환할 수 있는데, 그 중에서 우리에게 가장 익숙할 단어가 바로 '자연'이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제 갓 정주생활을 시작한 사람들은 아직까지 생자의 영역과 망자의 영역, 문명의 공간과 야생의 공간, 물적인 차원과 영적인 차원을 나누어서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망자의 의지와 야생의 금수와 영적인 존재를 무서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친구로 대접하며 정중히 어울려서 서로에게 호의를 가지고 증여의 순환을 이어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소 비약하면, 이들에게는 아직 전문적인 신령과 샤먼도 존재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가 세상 속에서 동등한 신령이었고, 때문에 누구나 언제든지 신령과 소통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것이 영원히 이어지지는 않았다.


 이 글의 전반적인 관점은 나카자와 신이치(中沢新一), 김옥희 역, 『신의 발명:인류의 지知와 종교의 기원』, 카이에 소바주 시리즈 제4권, 동아시아, 2005, 101~114쪽에 크게 빚지고 있으며, 이것은 다음 화에서도 마찬가지가 될 것이다. 본문에 서술된 조몬시대 중기의 환상취락에 대해서는 앞의 책, 109쪽 참고. 트로브리안드 군도의 환상취락에 대해서는 앞의 책, 110~111쪽 참고.

 보로로족 케자라 취락의 구조에 대해서는 클로드 레비스트로스(Claude Lévi-Strauss), 박옥줄 역, 『슬픈 열대』, 한길사, 1998, 412~414쪽 참고. 케자라 취락에서 이루어진 장례식에 대해서는 앞의 책, 434~435;438~439쪽;442~448쪽 참고. 나카자와 신이치도 상기한 『신의 발명』 111쪽에서 케자라 취락의 구조에 대해 요약적으로 설명하지만, "망자가 매장된 광장"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잘못 인지한 것이거나 지나치게 요약한 것이다. 케자라 취락에서 망자의 유골은 매장이 아니라 수장되었다.

 차탈회위크 유적의 매장관습에 대해서는 남영우, 『도시의 역사』, 푸른길, 2011에 상세한 설명이 있던 것으로 기억하나, 글을 쓰면서 직접 참고하지는 못하였다. 그 대신에 남영우, 「터키 아나톨리아의 先史聚落 차탈휘위크」, 『한국도시지리학회지』 제2권 2호, 1999, 53~54쪽을 참고하여 작성하였다. 차탈회위크와 비교되는 티코피아 섬의 가옥구조에 대해서는 앞의 글, 54쪽 참고.

 쿠쿠테니-트리폴리예 문화의 매장관습에 대해서는 데이비드 W. 앤서니(David W. Anthony), 공원국 역, 『말, 바퀴, 언어』, 에코리브르, 2015, 250:402~403쪽 참고. 기원전 3500년 경에 트리폴리예 문화 사람들이 초거대 환상취락을 이루었던 것은 앞의 책, 404~407쪽에 기술되어 있으며, 앞서 블로그에도 발췌한 바 있다. 존 랭카인 구디(John Rankine Goody), 『Cities before the State in Early Eurasia』, Max Planck Institute for Social Anthropology, 2015, 11쪽에 따르면 이곳의 중앙 광장에서는 매장이나 건축의 흔적을 거의 찾을 수 없었다.

 차하이 취락의 개요로는 박진호, 「요서지역(遼西地域) 초기 신석기문화 연구 : 소하서(小河西) · 흥륭와(興隆窪)문화를 중심으로」 인하대학교 대학원 융합고고학 석사논문, 2014, 54~55;100~102쪽 참고. 시기별 취락 구조에 대해서는 후 호자이(富宝財), 「中国東北地方の新石器時代における社会形態変遷の研究」, 九州大学大学院人文科学府 博士学位論文, 2018, 25~26;132쪽 참고. 묘제에 대해서는 앞의 글, 80~81;94쪽 참고.

○ 케자라 취락의 조감도
 Peter Blundell Jones, 「The Meaning of Use and Use of Meaning」, 『Field』 Volume 1, issue 1, 2007.

○ 조몬시대 중기 환상취락의 평면도
 Mutsuo Nakanishi, 「縄文の心を映すストーンサークル:縄文の円環を訪ねて」, 2015. 10. 10.

○ 차파예프카 취락의 평면도
 David W. Anthony, 「Seeds of Change on the Steppe Borders:Maikop Chiefs and Tripolye Towns」, 『The Horse, the Wheel, and Language』, 2007.

○ 티코피아 섬의 가옥구조 평면도
 남영우, 「터키 아나톨리아의 先史聚落 차탈휘위크」, 『한국도시지리학회지』 제2권 2호, 1999.

○ 오마라카나 취락의 평면도
 René Ohlrau, "Ethnographical parallels? Part 2 - The islands of love and Tripolje", Trypillian "mega-site" research, 2015. 3. 18.

○ 차하이 취락의 평면도
 富宝財, 「中国東北地方の新石器時代における社会形態変遷の研究」, 九州大学大学院人文科学府 博士学位論文,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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