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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 가진 자는 떠들라"

 마음만은 진성역덕 부여의 이글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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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을 만들어 봅시다 (5) 세계를 잇는 나무 역사 관련 게시물

※ 이 시리즈는 2015년 10월 31일에 개최된 부흥 1.5차 세미나에서 발표했던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주제가 '역사'라기보다는 역사학에 침해당했고, 지금도 침해당하고 있는 신화의 영역에 대해 다루는 것이지만, 단군신화를 신화역사화(euhemerism)하려는 기존의 추세에 이의를 제기하는 동시에 역사학과 신화학의 조화로운 발전을 기도하면서 이 글을 올려봅니다.
 이처럼 인간의 사회와 동물의 자연이라는 두 세계가 멀어질수록, 역설적이게도 두 세계를 중개함으로써 풍요의 지속 가능한 순환을 이어가려는 인류의 노력은 더욱 강화되기 마련입니다. 그러자 마침내 인류는 보이는 사회와 보이지 않는 자연이라는 두 세계를 연결하는 관문으로 나무를 동원하기 시작합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흔히 일컫는 세계수 내지 우주목이라는 개념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나무라는 상징을 통해 자연의 풍요로운 힘이 사회로 흘러들어와 곰이 인간이 되고, 석녀가 아이를 배고, 막대한 재화가 획득되고, 무한한 지혜를 얻을 수 있게 된다고 믿었던 것이죠.
 그런데 왜 나무일까요? 지금까지는 나무가 대지에 뿌리내리고 하늘로 솟아오르니 하늘과 땅을 잇는 매개체로서 상상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일반적으로 퍼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화에서 나무의 역할은 수직적이라기보다 수평적이고, 공간적이라기보다 차원적입니다. 시베리아의 샤먼은 나무를 통해 다른 차원의 세상을 여행하면서 귀신을 만나고, 그곳에서 영혼을 데려다가 여인에게 내려주지만 정작 나무가 하늘로 오르는 공간적 이동을 중개하는 사다리가 된다는 생각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나무가 세계를 잇는 상징이 된 이유가 그것의 순수증여적 특성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실버스타인이 쓴 동화의 제목처럼 말 그대로 '아낌없이 주는 나무'인 셈이지요. 토지로부터의 순환적 생산에 의해 생계가 유지되는 농경사회에서 나무는 말 그대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고는 그것을 다시 사람들에게 베풀어주는 고마운 존재였습니다. 구석기 시대의 수렵사회에서는 곰이 수행하였던, 그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는 다른 세상으로부터 오는 순수한 선물을 나무는 지금까지도 끊임없이 우리에게 내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나무가 세계의 매개체가 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지요.

 실제로 그림 형제의 신데렐라 이야기는 19세기의 '아낌없이 주는 나무'라고 할 수 있을만큼 이야기에서 나무가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흔히 알려진 페로의 판본에서는 요정 대모가 등장해 온갖 마법적인 선물을 신데렐라에게 줌으로써 그녀가 무도회에 참석하고 왕자와 결혼할 수 있게 하지만, 그보다 원형에 가까운 그림 동화에서는 친어머니의 무덤가에 심어진 개암나무에 의해 그와 같은 선물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의 전모를 모두 서술하자면 상당히 길어지지만 여기에서는 관련된 대목만을 일부 추려보겠습니다.
 하루는 아버지가 시내에 나가면서 딸들에게 선물로 갖고 싶어하는 것을 물었습니다. 그러자 계모의 두 딸은 아름다운 옷과 진주와 보석을 말했지만, 계모와 언니들의 구박을 받으며 '신데렐라(재투성이)'로 살던 전처의 딸은 그저 돌아오는 길에 아버지의 모자에 맨 처음 부딪친 나뭇가지를 꺾어서 선물해달라고 말할 뿐이었습니다. 그 부탁에 따라 아버지는 돌아오는 길에 부딪친 개암나무 가지 하나를 꺾어서 소녀에게 주었습니다.

 그러자 신데렐라는 어머니의 무덤가에 그 나뭇가지를 심었습니다. 그녀가 너무 심하게 울어서 눈물이 나뭇가지에 물을 준 셈이 되자, 나뭇가지는 순식간에 쑥쑥 자라서 훌륭한 나무가 되었습니다. 그날 이후 신데렐라가 하루에 세 번 그곳에 가서 울며 기도할 때마다 나무에 앉아 있던 작고 하얀 새가 그녀에게 원하는 선물을 물어다 주었습니다. 물론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신데렐라가 무도회에 가기 위해서 필요로 한 드레스와 구두도 바로 이러한 방법을 통해 그녀에게 주어진 선물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개암나무가 어머니의 무덤가에 심어졌다는 점에서, 그 나무를 통해 망자의 세계(자연)에 있는 어머니의 영혼과 인간의 세계(사회)에 있는 신데렐라가 서로 연결되어 무한한 선물이 주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나무를 통한 다른 세계로부터의 증여라는 모티프는 역시 유라시아 각지에서 발견할 수 있지요. 그 중에서도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흥부와 놀부 이야기에서 제비가 물어다 준 박씨라는 소재일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제비 자체가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다른 세계로부터 그 박씨를 가져온 것이라는 사실이 그것의 풍요로운 중개기능을 강조하는 장치가 됩니다.

 이제는 지금까지 주어진 정보로 고조선이 존재하던 기원전후에 존재하던 단군신화의 원형이란 무엇이었는지를 얼추 추론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당초 인간과 곰이 결합하여 아이를 생산하는 신화로 처음 생겨났으며, 이는 곰으로 상징되는 자연의 풍요로운 힘이 인간 사회로 들어와주길 기원하는 마음의 반영이었습니다. 또한 아이가 다시 곰이 되어서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은 그러한 자연의 힘을 인간이 독점한 채 자연으로 돌려주지 않는 것은 공정하지 못하고, 그러므로 풍요의 상호 확증적인 선순환이 파괴될 것이라는 순수한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다 농경의 시작으로 말미암아 인류가 마을을 이루어 살기 시작하면서 자연과 사회, 인간과 동물이 공간적으로 분리되면서 둘 사이를 중개하는 매개체는 더욱 많이, 보다 강하게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아이가 자연으로 돌아가면서 취하는 모습은 곰이라는 짐승의 가죽을 넘어서 산신이라는 초자연적인 형태로 확장됩니다. 그리고 인간과 곰이라는 이제는 멀어진 두 세계 사이의 결합을 중개하고 강화하는 매개체로 나무가 등장하게 되었던 것이죠.

단군을 만들어 봅시다 (4) 갈라진 세계 역사 관련 게시물

※ 이 시리즈는 2015년 10월 31일에 개최된 부흥 1.5차 세미나에서 발표했던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주제가 '역사'라기보다는 역사학에 침해당했고, 지금도 침해당하고 있는 신화의 영역에 대해 다루는 것이지만, 단군신화를 신화역사화(euhemerism)하려는 기존의 추세에 이의를 제기하는 동시에 역사학과 신화학의 조화로운 발전을 기도하면서 이 글을 올려봅니다.
 전편에서 우리는 곰과 인간의 내적 환원성이 표현되어 있는 몇 가지 신화들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신화들은 하나같이 주인공들이 곰과 같은 맹수가 되어 자연으로 사라지는 결말로 맺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처음 살펴보았던 톰슨 원주민 신화에서 주인공이 사냥꾼으로 성장한 채 일상으로 돌아왔던 것과 대조적입니다. 도대체 왜 신화의 주인공들은 동물이 되어 자연으로 걸어들어간 것일까요? 그리고 무엇 때문에 경제적이지도 못한 맹수의 가죽을 뒤집어쓴 것일까요?

 사실 이들이 곰이 되었던 것은 본래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었습니다. 우리의 주인공들은 단순히 강력한 반인반수가 아니라, 인간이 지배하는 공간인 '사회'와 맹수가 지배하는 공간인 '자연'이라는 두 세계를 넘나들 수 있는 중개적 존재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자연으로부터 얻은 무한한 풍요의 힘을 사회로 가지고 들어와 인간들에게 유통시키는 역할을 맡습니다. 그리고 인간도 이들을 통해 자신의 감사하는 마음을 자연에 전달합니다. 이와 같은 사고방식이 이해하기 어렵다면 무한한 마력을 평행세계에서 끌어온다는 개념이 구체화된 나스 키노코(奈須きのこ)의 아이템 '보석검 젤렛치'를 떠올리시는 것이 쉽겠습니다.
 따라서 반인반수의 신화 속 주인공들은 자연과 사회, 이상과 현실이라는 두 세계에 각기 한 발씩을 걸치고 있는 셈입니다. 이러한 비유는 신화 속에서 다시 구체적으로 형상화되는데, 바로 오이디푸스(Oedipus)나 신데렐라(Cinderella)와 같이 세계 각지의 신화에서 끈질기게 등장하는 절름발이들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중개자가 최종적으로 자연에 입성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인간으로서의 생명이 박탈되는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연의 왕으로서 즉위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즉 인물의 중개적 기능이 극대화되었음을 표현하는 장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신석기 시대에 들어와서 인류에게는 거대한 혁명이 일어납니다. 농경과 그에 따른 정주생활이 시작되고, 잉여 재화가 생성되어 사회의 조직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물론 아직은 초보적인 수준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는 그전까지 존재하던 인간과 동물 사이의 내적 동일시에 균열을 만들었습니다. 이전까지는 사회와 자연이 층위만을 달리하면서 한 공간에 중첩되어 있었는데, 인간이 마을을 이루면서 두 세계가 공간적으로도 분리되었던 겁니다. 이 간극은 인류의 문명이 발달할수록 더욱 더 벌어져서 급기야 인간과 동물을 분리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이러한 변형은 곰과 인간의 결합을 강제적이고 부정한 것으로 평가하는 북독일의 한 신화에서 잘 나타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동시에 둘의 결합으로 태어난 두 세계의 아이들이 뛰어난 기사가 됨으로써 중개자들이 자연으로부터 받는 강대한 힘을 표현하고 있다는 사실은 주목할 가치가 있습니다. 이 대목이 북유럽에서는 이들이 바로 위대한 왕의 조상이 되었다는 형태로까지 의미가 확장됩니다. 또한 동북아시아에도 이와 비슷한 곰나루 설화나 어원커 신화가 존재한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지요.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옛날 독일의 작센 지방에 무시무시하게 힘센 곰 한 마리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곰은 한 기사의 아내를 납치해 자신이 겨울잠을 자는 굴에 가두었습니다. 기사의 아내는 몹시 아름다웠으므로, 곰은 그녀를 겁탈하고 그로부터 몇 해 동안이나 자신의 '지옥 같은 굴'에서 그녀와 관계를 가졌습니다. 마침내 이 결합으로 기사의 아내는 세 명의 사내아이를 낳았습니다.

 그러던 중 다행히 한 나무꾼이 그녀와 아이들을 발견하고는 그들을 굴에서 도망치게 해 주었고, 그녀는 아이들과 함께 기사에게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녀와 곰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모든 이들이 논의한 끝에 성 근처에서 살게 되었는데, 훗날 모두가 위대한 작센 남작들 앞에서 기사로 서임받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털이 많고 곰처럼 머리를 약간 왼쪽으로 기울이는 버릇이 있는 것을 빼고는 다른 기사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지요. 그들은 아버지의 이름을 물려받아 곰의 아들들이란 뜻의 우르시니(Ursini)라 일컬어졌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처럼 인간과 동물 사이의 내적 동일시가 파괴된다면, 신화 속의 주인공들이 이전처럼 풍요를 가져오는 중개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기가 불가능해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큰 문제인데, 현실의 모순에 직면한 인간은 그 모순을 해소하기 위한 중개자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지요. 이러한 사람들의 요구에 부응하면서 주인공의 중개적 역할을 보조하고자 설정되는 존재가 바로 사회에서의 '샤먼'과 자연에서의 '산신'입니다.

 다만 여기에서 일반적인 신이 아니라 '산신'이라고 특정지어 말한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구석기 시대의 사람들이 인간의 내면이 사람인 것처럼 동물의 내면도 사람이라고 생각하였음은 앞서 이야기한 바와 같습니다. 이미 눈치채셨겠지만 여기서의 사람이란 곧 통상적인 의미와는 다른 것으로서, 일종의 스피리트(spirit)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전에는 나와 너를 막론하고 모두가 가지고 있어 시공간에 충만하던 스피리트가 사회와 자연의 공간이 떨어지면서 함께 분리됩니다. 곧 사회라는 일상의 스피리트와 자연이라는 비일상의 스피리트로 나누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이전까지 곰과 같은 맹수로 상징되는 자연의 스피리트가 수행하던 중개자의 역할은 마을의 외부에 존재하는 숲 속으로 밀려나게 됩니다. 나카자와 신이치는 이를 가리켜 내방신(來訪神)이라 하는데, 이들은 저승이나 바다와 같은 낯선 세상으로부터 들어와 불가해한 풍요나 재앙을 남기고 사라지는 특성을 띱니다. 그리고 '산신'은 바로 그와 같은 내방신이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하늘로 높이 솟아 있는 산이라는 지형은 그곳에 거처하는 스피리트를 높은 곳에 거처하는 일상의 스피리트로 오해하게 만들지만, 정작 그들이 수행하는 역할은 내방신의 특성과 일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산은 동시에 숲이기도 한 것이지요.

단군을 만들어 봅시다 (3) 곰의 반은 인간이다 역사 관련 게시물

※ 이 시리즈는 2015년 10월 31일에 개최된 부흥 1.5차 세미나에서 발표했던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주제가 '역사'라기보다는 역사학에 침해당했고, 지금도 침해당하고 있는 신화의 영역에 대해 다루는 것이지만, 단군신화를 신화역사화(euhemerism)하려는 기존의 추세에 이의를 제기하는 동시에 역사학과 신화학의 조화로운 발전을 기도하면서 이 글을 올려봅니다.
 대칭성의 원리로 탄생한 인류의 신화는 이윽고 '힘'이라는 추상적인 관념이 인류의 사고에 정착되면서 특히 곰으로 대상이 특정되어 나간 것으로 생각됩니다. 위 사진은 알프스에 있는 드라헨로흐(Drachenloch) 동굴에 있는 구석기시대의 소상인데, 이곳의 비어 있는 머리에는 곰의 두개골이 놓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소상에 무엇인가 종교적인 의식이 치러진 흔적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늦어도 3만 년 전에는 이미 인류가 곰을 자연 전체를 대변하는 상징적인 존재로 인식하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우선 곰은 강대한 힘으로 먹이사슬의 정점에 존재하는 자연의 지배자입니다. 더군다나 인간과 비슷하게 두 발로 걷기도 하고, 앞발을 손처럼 사용해서 꿀을 채집하거나 물고기를 잡기도 합니다. 이러한 곰의 생태로부터 인류는 곰을 더욱 쉽게 사람과 환원 가능한 존재로 인식할 수 있었을 겁니다. 심지어 고대 유럽에서는 곰이 사람처럼 서로 마주보고 교미할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톰슨 원주민들의 신화에서는 그들 경제의 근간인 야생 염소가 자연을 대변하고 있었지만, 그와 멀지 않은 곳에서 야생 염소의 자리가 곰에게로 넘어간 신화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로 알래스카의 아타파스칸 신화입니다.
 어느 날, 숲에서 산딸기를 따던 한 소녀가 잘생긴 한 남자를 만났습니다. 남자는 좋은 산딸기가 있는 곳으로 소녀를 안내하면서 며칠을 그녀와 함께 지냈는데, 소녀가 이만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하자 그때마다 주술을 걸어 소녀가 집을 잊게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소녀는 남자와 함께 지내면서 그가 사실은 큰곰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 남자는 이따금 샤먼처럼 달빛을 받으며 노래를 부르고는 했습니다.

 어느덧 겨울이 다가오자, 남자는 굴을 파고 들어가 소녀와 함께 겨울잠을 자기 시작했습니다. 긴 겨울이 지나고 봄이 돌아오자, 잠에서 깨어난 소녀는 여자아이와 남자아이 한 쌍을 낳았습니다. 하지만 집을 몹시 그리워하던 소녀는 마침내 굴 주위로 자신의 인간 가족들을 유인해왔고, 그들이 큰곰을 죽이자 아이들과 함께 가족에게로 돌아왔습니다. 소녀는 자신의 남편이었던 큰곰의 머리와 꼬리를 그가 일전에 가르쳐준 방법대로 정성스럽게 장사지내고, 아이들과 함께 외딴 오두막에 살았습니다.

 그런데 다시 한 해가 지나고 이듬해 봄이 되어, 암수 두 마리 새끼가 있는 암곰을 잡은 소녀의 가족들은 그 가죽을 소녀와 아이들에게 씌우고 놀림감으로 삼았습니다. 소녀가 그랬다가는 자신이 곰이 되고 말 것이라며 애원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정말로 소녀와 아이들은 네 발로 걷기 시작하더니, 이내 완전히 곰이 되고 말았습니다. 곰은 막내동생을 제외한 온 가족을 몰살시키고 숲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습니다.
 이처럼 곰과 결혼하고 나중에는 곰이 되어버린 여자에 대한 신화가 연해주 북부의 오로치인과 나나이인들에게도 비슷하게 구전되고 있다는 점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다만 이들의 신화에서는 아이들이 새끼곰이 되지 않고 인간으로 남고, 그와 연관되어 이 아이들이 나중에 실수로 잡은 암곰을 해체해보니 그것이 자신들의 어머니였다고 하는 신화로 살짝 변형되었습니다. 이것은 곰과 인간이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주제의식을 반복으로써 한번 더 강조한 것이지요. 또한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한 그리스 신화는 몇 가지 세부적인 변형이 일어난 것을 제외하고는 전체적인 구조가 아타파스칸 신화와 놀라울 정도로 일치하고 있습니다.
 이 신화에는 아레스의 외손녀로 반신반인인 폴리폰테(Polyphonte)라는 소녀가 등장합니다. 그녀는 아르테미스의 이름을 걸고 순결을 맹세하는데, 이를 자신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인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는 온갖 방법으로 그녀를 회유하지만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마침내 화가 난 아프로디테는 그녀가 곰에게 기괴한 욕망을 품도록 만들었고, 이로써 맹세를 어긴 폴리폰테는 아르테미스에게서 추방되어 친정으로 가 두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결과 태어난 두 아들의 이름은 야만인이라는 뜻의 아그리오스(Agrios)와 산사람이라는 뜻의 오리오스(Oreios)였습니다.

 그런데 매우 강한 존재였던 아그리오스와 오리오스는 인간만이 아니라 신조차도 두려워하지 않았고, 이따금 지나가는 사람들을 잡아먹기까지 했습니다. 이를 보다 못한 제우스는 헤르메스를 보내 그들을 벌하게 했지만, 자신의 자손들을 동정한 아레스는 헤르메스를 설득해 그녀와 두 아들을 새로 변신시키는 것으로 타협을 보았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이 워낙 강력한 존재였기 때문에 많은 새 중에서도 맹금류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바로 폴리폰테는 올빼미가 되고, 아그리오스는 독수리가 되고, 오리오스는 부엉이가 되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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